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婚禮


구름 한 점 없이 유난히도 청명한 하늘을 맞은 어느 6월.
천인국의 수도 장안, 그중에서도 정 승상 댁 하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바쁜 아침을 시작했다.

 

"자, 빨리 서두르자고!"
"이봐, 그건 이쪽으로 옮겨 놓는 편이 좋겠어."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집 안 곳곳마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의 떠들썩한 소리로 가득 찼지만, 그 소란을 반가워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문틈 사이로 엿보던 정 승상 댁 막내아들, 정경원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거기 밖에 아무도 없느냐."
"아,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마침 경원의 방 앞을 바삐 지나가던 한 하인이 그의 부름에 답하였다.
잠이 덜 깼는지, 경원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그럼 준비를 부탁하지."
"네, 도련님."


이후로도 몇 가지 당부를 마친 경원이 이만 나가보라는 듯 하인에게 손짓하자,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경원의 방을 빠르게 나섰다.
하인이 나간 곳을 잠깐 동안 멍하게 바라보던 경원은 창 너머의,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랗게 물든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오늘같이 중요한 날 혼례식 아침부터 ─ 흐린 하늘을 맞이했다면 필시 그애가 슬퍼했을 테니까.

 

"・・・・・・하아, 혼례라."


혼례식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바쁘게 움직이느라 한쪽으로 미뤄두었던 긴장이 이제야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경원의 손끝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어쩐지 가슴께도 저릿하면서 두근거리는 생경한 느낌에 경원은 떨리는 손을 가슴 부근에 갖다 대곤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혼례의 혼이라는 글자조차 떠올릴래야 떠올릴 수 없는 사이였는데. 소꿉친구를 찾기 위해 그 먼 화주에서 예까지 와서는, 제가 아끼던 꽃나무를 협박에 사용할 정도로 참으로 대단한 기개의 소녀, 그저 그것이 경원이 느낀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남장까지 하고 여길 올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자연스레 떠올린 그 애와의 첫 만남에 이내 긴장으로 굳어있던 경원의 얼굴에 미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분명 경원에게 있어서 그녀와의 첫 만남은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건만 그럼에도 잊을 수 없었고,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이었다.
그렇게 한 번 물 밀듯 밀려들어 온 생각은 돌아나갈 마음이 없는 것마냥 어느새 경원의 머릿속을 가득 메워갔다. 그녀에 대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제 저녁부터 긴장으로 인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건 잊었는지 그의 입에선 어느새 작게나마 콧노래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을 두어 번 두드리는 소리에 낯부끄러운 행동을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란 경원이 어깨를 움츠렸다.


"도련님, 목욕물을 받아 놓았으니 씻고 나오시는 대로 혼례복을 준비하겠습니다."
"아・・・알・・・알겠네. 흠흠, 곧 나가도록 하지."


무안한 마음에 크게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선 경원은 하던 생각을 지우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막 뜨끈한 물에서 나와 노곤해진 몸을 잠시 누일 새도 없이 경원의 혼례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돈한 후, 미리 준비한 혼례복으로 갈아입으며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아까보다 더욱 낯선 그 기분에 경원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도련님? 무언가 마음에 안 차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그보다 어떠느냐?"


경원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던 하인은 찬찬히 그를 바라봤다.
이전보다 키도 커지고 가끔이나마 청운과 무예 수련을 한 덕분인지 단정하고도 우아한 짙은 푸른 빛깔의 혼례복은 경원과 퍽 잘 어울렸다.

 

"도련님은 장안 제일의 신랑감 아니겠습니까. 무척이나 잘 어울리십니다."


그야말로 옷 태가 나는 그 모습을 아마 장안의 다른 여인네들이 본다면 분명 국에 소금을 넣지 않는 거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허나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 없다는 듯 경원은 그가 벗어 놓은 옷을 집어 든 하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내가 따로 부탁한 건?"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들여올까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경원의 모습에 하인은 곧 방에서 물러났다. 하인이 재차 경원의 방으로 들어 온 건 그로부터 수 분이 지나서였다. 다시 들어온 그의 손에는 누가 봐도 아름답고 화려한 꽃다발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꽃다발을 받아든 경원은 하인이 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야 꽃향기를 크게 들이켰다. 다행이도 시든 꽃 하나 없이 꽃들은 생생한 향을 내뿜었다.
 

"잘 어울리겠지?"


신월국에서만 핀다고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어려운 이름의 화려한 노란 꽃들이 샛노란 장미를 가운데로 하여 에워싸고 있었다. 그 애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꽃을 고르느라 몇 날 몇 일을 꽤나 고생했던 기억과 함께 방 안 가득 은은하게 풍기는 꽃내음에 경원의 입꼬리가 올라가던 찰나,
다시 한 번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린 문 앞에는 오늘 있을 혼례식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경원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 소녀─양소유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짠! 어때?"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와선 헤실헤실 웃으며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한 바퀴 도는 소유의 행동에 경원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그저 눈만 끔뻑였다.
 

"・・・・・・"


소유의 피부색과 잘 어울리는 옅은 분홍빛 비단옷에 단아하면서 어딘가 화려한 자수가 은은하게 새겨져 있는 소유의 혼례복은 마치 선계 선녀들의 옷처럼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하늘하늘 바람에 흩날렸다. 활짝 웃는 소유를 보고도 경원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뭐야, 너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 뛰어왔는데. ・・・・・・그렇게 별로야?"


멀뚱멀뚱 바라만 보는 그에게 소유가 살짝 풀이 죽어 작게 속삭였다. 방안에는 둘 뿐이었던지라 소유의 목소리는 곧장 경원의 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아니!"
"그럼 왜 아무 말이 없어?"
"그・・・그건・・・뭐・・・어・・・음, 네가 귀여워서・・・・・・"
"뭐?"
"아, 귀엽다고! 못 들었으면 말아. ・・・・・・다 들어놓고 못 들은 척하기는."


얼굴, 목, 귀 어디 하나 붉게 달아오르지 않은 곳이 없던 경원이 눈을 질끈 감고선 버럭 성을 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유는 다시 눈꼬리를 접어 크게 함박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나 참, 뭐가 좋다고 활짝 웃어?"
"그야 천하의 정경원이 귀엽다고 해주는데 안 웃고 배겨?"
"・・・・・・이 못난아! 그렇게 웃지 말라니까. 다른 남자들이 반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너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너 엄청 예쁘단 말이야・・・・・・."


마지막 말은 기어가듯이 말한 경원이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애먼 창밖만 바라봤다.
 

"에이~ 장안 제일의 일등 신랑감이 옆에서 무시무시하게 눈을 뜨고 있는데 누가 감히 날 보고 반하겠어?"


화창한 바깥 날씨처럼 또 한 번 활짝 웃는 소유를 보며 경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됐다, 됐어. 무릎까지 꿇은 마당에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경원을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소유가 문득 탁자 위에 놓인 노란 꽃다발에 짐짓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이거? , 혹시 요즘 신월국에서 유행한다는 부케?"


살며시 끄덕이는 경원에 소유가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흠흠・・・그 뭐야・・・음・・・신월국에서는 혼례 날 정인에게 그 부케라는 것을 선물하면 백년해로를 한다 하길래. ・・・・・・어때?"
"・・・・・・예쁘다. 향기도 좋고. 고마워, 경원아. 근데 어쩌지? 난 준비를 못했는데."


시무룩한 소유에게 경원은 손을 내저었다.
 

"됐어.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거니까. 이 못난아 그런 얼굴 하고 있으면 내가 꼭 나쁜 놈이라도 된 거 같잖아."
"언제는 웃지 말라더니~"
"그, 그건!"


풀죽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내 노란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소유의 모습에 경원은 마음 한구석이 두근거리면서도 한편으론 잠깐 잊고 있던 긴장이 재차 몰려 들어왔다.
 

"・・・・・・넌 안 떨려?"
"응? 뭐가?"


순간, 경원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왔다. 그 안에는 초조, 설렘, 걱정, 기쁨, 불안, 기대와 같이 서로 상충하는 감정이 순서 없이 마구 섞여 제멋대로 구는 듯 했다.
 

"바보, 혼례 말이야. 무신경하기는."
"뭐? 이게, 나도 당연히 떨리거든? 그래도・・・・・・"


떨린다 말하면서도 긴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에 경원은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난 기대되는 걸 너랑 함께 할 . 미래는 분명 즐겁고 행복한 일만 가득할 테니까."


경원의 손을 제 두 손으로 꼭 감싸 쥐는 소유의 눈동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전에 진해국에 갈 때도 말했지만 난 너랑 있으면 어떤 문제도 다 헤쳐나갈 자신 있어. 난 널 믿으니까."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면서 말하는 소유 덕분이었을까. 경원의 굳어있던 입꼬리가 평소와 같이 올라갔다.
 

"어때? 내 마법의 주문."
"・・・・・・말해 뭐하겠어. 효과 만점이야."


그 어느 날, 진해국에서의 일들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렇게 어려운 일도 둘이서 함께 헤쳐 나갔지.
경원의 눈빛에서는 이전과 같은 떨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저나, 넌 나에 대해서 뭐 할 말은 없어?"


조금 전까지 긴장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이번엔 경원이 먼저 짓궂게 웃어 보였다─소유가 한 것처럼 옷자락을 한손으로 잡아 올리면서.
천연덕스럽게 사뿐히 한 바퀴 도는 그 모습에 소유 자신도 모르는 새 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 참, 웃지만 말고 이제 그만 얘기해주시지."


곧이어 들을 말에 대해 기대라도 하는 것인지 어딘가 들뜬 얼굴을 한 경원의 모습에 소유가 몇 번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가까이 와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리고는 누가 들을까 경원의 귀에 바짝 다가갔다.

 

"・・・・・・지금 네 모습 진짜 믿음직스럽고 멋있어. ・・・・・・그리고 난 이런 경원이 널 정말로・・・・・・"


그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열릴 줄 모를 것 같았던 문이 다짜고짜 열렸다.

 

"뭐야, 갑자기!"
"경원!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무슨 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헐레벌떡 경원의 방에 들어온 사람은, 청운이었다.
 

 

* * *
 

"경원아, 이제 가야할 시간이야. 그만 일어나."
"야, 정경원.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야. 빨리 일어나. 얘도 참, 같이 시험 대비하자고 도서관 가자할 땐 언제고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자고 있네."


세상 모르게 자고 있던 경원의 눈꺼풀이 주변의 소란에 천천히 올라갔다.
 

"・・・・・・여긴・・・・・・"
"얼씨구, 우리 경원이 꿈 꿨어요? 야, 사실대로 말해.

 너 어젯밤에 공부 안하고 그냥 잤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꿈이라고?"


아직도 잠기운이 남아있는지 경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새 10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창밖의 하늘은 벌써 어두컴컴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책상 앞을 보고 있자니 소유와 청운이 가방에 참고서와 공책을 넣으며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경원아,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소유는 우리가 데려다주자."
"・・・・・・말도 안 돼. 그게 다 꿈이라니. ・・・・・・손청운 이 방해꾼!"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얼굴에 자국이 난 것도 모른 채 경원이 잔뜩 부루퉁한 얼굴로 청운에게 냅다 짜증을 냈다.
 

"네가 뭐 때문에 짜증이 난 건진 모르겠지만, 남 탓을 하는 건 좋지 않아."
"맞아, 잘 자놓고 왜 또 청운이한테 심통이래. 너 솔직히 말해봐. 어젯밤에 공부하느라 밤샌 거지?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저녁 먹고 도서관에 오자마자 잘 수 있어?"


잔뜩 성을 내는 경원을 한참 동안 키득대며 바라보던 소유가 눈을 흘기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우리 내기한 거 잊지 않았지?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10개."


마지막 아이스크림 단어를 하나하나 끊어가며 강조하듯 말하는 소유에 경원이 코끝을 살짝 찡그렸다.
 

"・・・・・・이 바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럼 뭐가 중요한데?"


소유가 얼굴 가득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경원은 그런 그녀의 물음에도 퇴실 시간에 맞춰 짐을 정리하는 다른 사람들을 시큰둥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꿈・・・・・・어디서 들었더라・・・・・・"
"얘가 잠이 덜 깼나."


고개를 갸웃하는 소유를 뒤로하고 경원은 절대 잊지 못할 그 날의 기억을 살며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는 데도 자다 일어나선 배시시 웃으며 막무가내로 저를 좋아한다 고백한 그 날의 소유를.
 

"・・・・・・설마."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경원은 가방을 챙기던 손을 잠시 멈췄다.
 

"청운아, 경원이 설마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이마에 손을 대보려던 소유의 행동에 깜짝 놀란 경원이 얼굴을 붉힌 채 뒷걸음질을 쳤다.


"・・・・・・야야, 갑자기 오면 어떡해! 멀쩡하거든?"
"걱정되니까 그렇지!"
"크흠, 어쨌든 그건 그렇고・・・네가 저번에 수업 시간에 꿨다는 꿈 말이야・・・・・・."
"뭐야, 아까부터 자꾸 꿈 타령이야."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그・・・왜・・・있잖아, 그 뭐야・・・자다 깨서는 말해준 꿈 말이야."
"자다 깨서? ・・・・・・아아, 혹시 수업 시간에 그 신기한 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날에 들은 그녀의 꿈 이야기. 가벼이 흘려 넘기기에는 신기하고 기이했던 그 꿈을 자신도 꾼 것이기를 바라며 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 아래 어느 샌가 켜진 가로등만이 환하게 빛을 내며 사람들을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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